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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바넬의 생츄어리

최초의 강호인 ~~ 굴원 본문

무협의 세계

최초의 강호인 ~~ 굴원

카바넬 2019. 11. 2. 18:56

강호 문파들의 지도

 

중국의 무협은 강호江湖라는 세계에서 벌어진다. 한국인들도 즐기는 한국무협에도 당연히 나오는 세계인데~~

이 강호라는 용어의 의미에 대해 정확한 개념은 없다.

최초로 ​ 사마천의 사기에 乃乘扁舟 浮江湖라는 글을 쓰면서 강호江湖라는 용어가 ​후대 문인들에게 사용되기

시작한 걸로 추정된다.

강호의 의미에 대해 여러 가지 설들이 있지만, 나는 강호의 현실적 의미로는 장강과 동정호의 강남 지방,

관념적으로 강과 호수를 의미한다. 인간은 강이나 호수가 없으면 살수가 없다. 즉 인간이 사는 일반적인 세상을 의미한다

로 정의한다.

 

굴원과 어부의 대화

 

중국의 선비와 문인들이 왜 강호를 무대로 하는 시와 문학 작품들을 남겼는지에 대해 개인적인 의문이 든다.

그래서, 찾아보니 유명한 굴원의 비가가 연상되었다.

 

 

500년 넘게 지속된 춘추전국시대를 통해 중국 대륙은 전쟁과 약탈, 파괴, 기아, 역병, 능욕의 참상이 곳곳에

벌어졌다. 남자들은 어린 소년에서 노인들까지 모두 전장에 끌려나갔고, 여자와 아이들은 기아와 역병에

고통을 받고 있었다. 심지어 여자들까지 전쟁터에 끌고 나가는 일도 흔했다.

합려왕이 여자들로 군대를 만들어 보라고 손자를 시험했던 일이 있을 정도다.

 

이러한 참상이 수 세기 동안 벌어지자, 많은 사람들이 전란을 피해 당시 미개지였던 강남으로 이주해 온다.

호랑이보다 무서운 게 사람이라는 말처럼 왕들의 폭정과 귀족들의 수탈, 징용을 피해서 많은 이들이 피난을 온 것이다.

 

양쯔강

 

당시 강남은 광활한 평야의 중원과 달리 아열대의 습지로서 강과 호수가 많았기에 사마천이 강호라고 불렀던 듯 하다.

강남에는 한족과 다른 묘족과 월족이 살고 있었지만, 문화수준이 미개하고 인구가 적었기에 한족들은 무한대로 넘쳐나는 빈 땅에서

화전을 일구고, 어업과 임업에 종사하면서 생계를 꾸려 나간다.

중원의 선진문명을 묘족과 월족에게 전수하면서, 점차 우월한 인구수에 기대어 한족화시켜 나가면서, 중원문화가 전파된다.

 

동정호의 어부

 

중원에서 이주해 온 수많은 선비들은 농업, 어업, 사냥, 벌채 등을 하면서 비록 중원의 풍요한 화려함과 다른 가난하고 소박한 삶이지만 평화로움을 시로 읊기 시작한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과 야심은 끝이 없는 법인지~~ 중원의 전쟁은 곧 강남까지 옮겨 붙는다. 강남의 초는 원래

중원의 한족과 다른 묘족이지만, 중원에서 피난오는 이민자들에 의해 강성해지고, 점차 주 왕조에 맞서는 새로운

왕을 선언한다. 아마 중원 이민자들에 의해서, 주 왕실의 패권의식을 알게 되고, 의식적으로 반항심이 생긴 듯 하다.

너가 천하의 주인으로 행세하는데 나라고 못할 소냐?

사건의 발단은 BC704년 주환왕 16년에 초 웅통이 한수에서 회맹을 주재하면서다.

당시 10여 개의 나라~파나라, 용나라, 복나라, 등나라, 교나라, 나(羅)나라, 진(軫)나라, 신나라, 이나라, 운나라, 강나라와

회맹을 한 것으로 황(黃)국과 수(隨)국이 참여를 거부하여 정벌하는데 수(隨)국이 남만 오랑캐 자작국인 초가 칭왕한 것을

주환왕에게 알린다.

그래서 주왕은 화를 내며 승인을 거부하자 웅통은 칭왕하여 자칭왕이 되고 초무왕이라 한다.

중원 국가들이 보기에 야만족인 초가 스스로 천자임을 참칭한 것으로 주 왕실에 대한 반역이자 패역무도였다.

그래서, 천자의 위엄을 보이자면서 중원국가들과 초의 오랜 전쟁이 시작된다.

 

남방의 초는 영토는 거대했으나, 인구가 중원에 비해 적었기에 중원의 패권 대결에서 아무래도 소외된 상태였다. 그래서, 전국시대

에 와서는 절대강자로 부상한 진秦의 침략에 시달린다.

 

춘추시대의 패권국이었던 과거가 무색할 정도로 초는 진秦의 눈치만 보면서 안위에만 급급할 뿐이었다.

진秦소양왕은 초회왕에게 만나서 강화를 맺자고 속인다. 무력한 초회왕은 그 말에 따르려고 하자, 굴원이 반대한다.

간사한 진秦의 속임수입니다. 왕께서 가시면 영원히 포로가 되실 겁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왕은 충언을 거절했고 결국 포로가 되서 분사한다.

 

 

굴원은 이런 사태에 처하자 비분강개해서 울분을 터뜨리는데, 반대파들은 오히려 그에게 책임을 물어서 양쯔강 이남의

동정호의 주변에 유배시킨다.

그는 미개지인 강호를 산발한 채 방황하면서, 시를 읊는다.

​천재적인 시인이었던 그가 남긴 어부사, 이사 등의 걸작들은 무능하고 어리석은 군주와 부정부패하고 탐욕적인

정치가들에게 희생당한 고고한 선비의 비육지탄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어서 2300년이 지난 현대인들에게도

깊은 감동과 찬사를 받고 있다.

 

 

 

이렇듯 강호를 주유하면서, 억압되고 박해받는 선비의 고고한 이상과 자유를 추구하면서, 애국과 충성을 호소하는

그를 중국 최초의 서정시인이라고 평가한다.

그의 시는 확실히 강남인 답게 서정적이고 감정에 솔직하며 함축적이다. 중원의 시는 형식과 명분에 치우친 점과

상이하다.

특히 권력에게 탄압과 박해를 받는 개인의 고통과 슬픔, 고독을 더없이 진솔하게 묘사한다는 점에서 후대의 선비와

문인들에게 각광을 받는 계기가 된다.

 

그래서, 중원의 전쟁을 피해서 강남으로 이주해 온 후대의 선비와 문객들이 굴원의 생애를 기리고, 그의 작품들의 후속작들을 창조한 것이다. 세상의 부조리와 비극, 모순을 목도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이상사회를 꿈꾸는 현대의 문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굴원이 방황하면서 노래를 부르던 강호를 현대 무협세계의 무대로 만든 것이다.

황제와 귀족의 지배를 받지 않는 자유의 세계를 강호라고 부르는 이유가 최초의 강호인 굴원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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