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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바넬의 생츄어리

김용의 라이벌이자 무협 세계의 창조자~~ 와룡생!! 본문

무협의 세계

김용의 라이벌이자 무협 세계의 창조자~~ 와룡생!!

카바넬 2019. 10. 30. 18:59

                    대만 신무협의 창조자였던 4명의 문인들, 왼쪽부터 사마령, 와룡생, 제갈청운, 고룡이다.

 

2차 세계대전과 뒤이어 벌어진 국공 내전으로 중국 대륙은 무협물에 나오는 참상보다 더 처참한

학살, 능욕, 약탈, 방화, 기근 등의 지옥도가 펼쳐진다.

마치 무협에 나오는 영웅호걸들 = 범죄자들이 곳곳에서 약자들을 착취하고 압제하는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각지에 웅거한 군벌들과 세력가, 야심가들은 돈, 권력, 종교의 힘을 빌려서 스스로 천하통일을 이뤄서

지상천국을 이루겠다는 식으로 대중들을 선동하면서 치열한 전쟁과 암투를 벌이는 상황이었다.

한마디로 곳곳에서 살인, 강간, 약탈이 태연하게 벌어지는 현세의 지옥도였던 셈이다.

 

장개석과 모택동

이러한 영웅호걸들 중에 가장 큰 세력을 가진 이는 국민당의 장개석과 공산당의 모택동이었다.

두 사람은 천하통일과 지상천국을 대중에게 선전하면서, 전쟁을 벌인다.

당연히 전쟁에 동원할 물자와 인력을 대중들에게서 약탈하면서~~ 그래서, 당시 군대에는 강제징집되어

끌려온 어린 소년과 노인들이 많았다.

 

당시 어린 우학정(牛鶴亭, 뉴허팅)은 국민당 군대에 징집되어서 여러 전선을 끌려 다닌다. 그래서, 제대로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무협 소설을 읽으면서 상상의 나래를 펴면서 고된 생활을 견뎌나간다.

장개석이 패배해서 대만으로 밀려 가자, 손립인의 군대 소속으로 따라 간다.

대만에서 고위장교로 승진했으나, 56년 손립인 사건에 연루되어 전역한다. 이후 생계를 위해서 삼륜차를 끌기도 하는 등

어렵게 살다가 친구의 동장철의 권유로 무협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어린 시절부터 전쟁터를 전전하다 보니 정규학교교육을 받지 못했던 지라, 작가로서 교양이 부죽했고 오타가 많았다. 그래서, 서구문학을 읽으면서 지성과 문장력을 연마한다.

1957년 와룡생(臥龍生)이라는 필명으로 데뷔, 대만의 성공만보(成功晩報)에 처녀작 풍진협은(風塵俠隱)을 발표했다.

풍진협은의 성공 이후 민성일보(民聲日報)에 경홍일검진강호(驚虹一劍震江湖)를 실어 대성공을 거뒀다.

1958년 대화만보(大華晩報)에 비연경룡(飛燕驚龍)을 연재하며 일약 무협소설의 거장으로 발돋움한다.

비연경룡의 히트를 통해서 대만 무협의 태두로 부상했는데, 특히 여기에서 무림구대문파, 강호대일통 같은 무협에서만

사용되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했기에, 신세대 무협의 창조자로서 인정받게 되고, 이후 등장하는 작가들이 모두 그가

창조한 용어를 사용한다. 심지어 김용도 67년 소오강호에서 이 용어들을 사용할 정도였다.

 

그가 최초로 창조한 무협의 용어들은 유행처럼 번져서 이후 등장하는 무협 작가들이 전부 사용했고, 그래서 한국팬들도

무림제패, 무림맹주, 구대문파, 오대세가, 정파, 사파 등의 용어를 알 정도였다.

와룡생 이전의 무협에는 수호지, 삼국지 같은 영웅호걸물이 주류였지만, 와룡생 이후에는 구대문파, 무림, 강호, 세가 등의

현실과 가상의 세계, 역사, 인물이 조화된 새로운 무협의 세계가 창조되면서 구무협과 차별되는 신무협의 시대가 열렸던

것이다.

동일한 세계관과 역사, 지리를 갖지 못했던 구무협과 차별되는 신무협의 등장은 중화세계를 넘어서는 중국식 판타지의

무한한 상상력과 창조력의 공간을 창조했기에 한국인들도 중국무협에 열광하게 된다. 한마디로 동아시아인들 전체의

상상력과 감동, 재미를 공감하게 만드는 중국 신무협의 창조자가 바로 와룡생이었던 것이다.

 

와룡생이 새로운 신무협의 세계를 창조한 이유에 대해서는 그가 어린 시절에 겪었던 고통스러운 전쟁의 기억 때문일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전쟁에 끌려나가서 기아와 추위, 죽음과 싸워야 했던 불우한 생애를 통해서, 세계와 민생의 구원 해방을 위해서 무림의 영웅이 나타나길 바라는 소망이 담겨 있는 것이다.

 

외세의 침략과 학살, 무능하고 부패한 권력자에게 착취와 압제를 당하는 중국민중들의 애환과 고통을 해방시켜 줄 구원자의 모습을 무협을 통해 형상화했던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식민 지배와 전쟁, 군부 독재를 겪어왔던 한국인들에게도 깊은 감동과 공감대를 형성했기에, 중국무협에 열광하면서 한국무협을 창조했던 것이다.

 

이렇게 50~60년대 전성기를 달리던 그도 갑자기 몰락을 하게 되는데~~ 바로 인생 최대의 라이벌로 불리는 김용 때문이다.

와룡생을 필두로 해서 대만무협이 전성기를 달리자, 홍콩에서 김용과 양우생의 무협이 등장한다.

대만은 홍콩의 무협을 70년대 해금했고 김용의 작품이 수입되면서 와룡생은 퇴조하기 시작한다.

 

사실 와룡생은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기에 문장력이 서툴고 오타도 많았기에 신문에서 교정을 자주 했다.

그에 비해 김용은 명문가 출신의 선비로서 동서양의 사상과 문학에 밝았고, 신필이라고 불릴 정도로 뛰어난 문장력을 가졌다.

한마디로 김용의 작품이 주는 강렬하고 웅장한 재미와 감동에 밀린 듯 하다.

 

그래서, 70년대부터 자신의 작품들을 소재로 TV 드라마로 눈을 돌려 각본가와 제작자로서 활동하기도 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그동안 모아둔 재산을 모두 날린다.

이후 다시 작가로 회귀하여 신작을 작성하지만 실패하고 생활고를 겪는다.

 

생계가 곤란해지자 노년에 그는 필명을 출판사에 팔아서 연명하고, 작가로서 경력을 마친다. 그의 필명을 산 출판사는 그의 필명을 빌려서 다량의 위작을 찍어내어, 그간 저술한 출판물과 드라마 판권도 모두 잃게 된다.

 

노년의 와룡생

 

마치 무림의 영웅처럼 밑바닥에서 승천해서 신무협의 창조자로서 현대의 무림영웅으로 군림했던 와룡생은 1997년 쓸쓸하게 타계한다.

미천한 신분에서 신비의 무공으로 천하를 진동시켰던 무림의 영웅처럼 오직 필력 하나로만 동아시아 무협 세계를 창조했던

그가 남긴 유언은~~ " 내 이름을 찾아와라"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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