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카바넬의 생츄어리

주원장의 일생일대의 라이벌 진우량 본문

세계의 역사

주원장의 일생일대의 라이벌 진우량

카바넬 2020. 3. 31. 22:41

원나라 말기의 군벌들

원나라 말기의 폭정과 수탈이 극에 달하고, 기근과 역병이 창궐하면서 중국 대륙에서 농민들의 반란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산발적으로 일어났던 농민의 반란은 곧 진압당하고 만다. 시간이 흐를 수록 농민의 반란은 더욱 대규모로 조직화되고, 교조화되기 시작했다. 1000여 년 전에 황건적이 도교의 말세 사상에 근거해서 난을 일으켰듯이 서방에서 전래된

마니교 = 명교의 종말론과 구원론이 불교와 도교의 사상과 혼합되어 탄생한 신흥종파 백련교가 황건적의 난을 일으켰다.

 

1351년, 유복통이 두준소, 나문소, 성문욱 등의 도당들과 내통하여 백련교의 교주인 한산동을 송 휘종의 8세손이라고 거짓 선전을 하면서 송의 황제로 옹립한다. 그러나, 사전에 모의가 탄로나서, 한산동이 체포되어 사형을 당하자 유복통과 일당들은 도망쳐서 한산동의 아들 한림아를 세상의 구세를 위해 강림한 미륵불로 선전했다.

 

 황하의 범람으로 제방을 수리하기 위해서, 원 조정은 15만의 인부와 2만의 병사를 하남에서 징발하여 8개월 간의 무상노역을 시켰다. 공사는 성공적이었지만, 하남에서 징발된 인원들은 무상 노동을 했고, 심지어 제반 경비마저 부담해야 했다. 그래서, 하남 백성들의 몽고인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했는데, 백련교도가 인부들 사이에 잠입해서 선동을 했다.

백련교는 불만에 가득한 민중들에게 미륵불이 강림해서, 새로운 세상을 열고 구세를 한다는 낭설을 퍼뜨렸고, 선동된 민중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그 유명한 홍건적의 난이 터졌다.

백련교도들은 원에게 망한 송 왕조의 복수를 하고, 송의 부흥을 외치면서 머리에 빨간 두건을 둘렀기에 홍건적이라고 불렸다.

 

홍건적의 난으로 대륙 전체가 반란의 불길에 휩싸이면서, 서수휘, 곽자흥 등도 호응해서 일어났다.

진우량은 호북성 면양의 어부 출신으로 원래 성씨는 사씨(謝氏)였는데, 이는 진우량의 할아버지가 데릴사위로 들어가서 진씨가 되었다.  서수휘가 이끄는 홍건군이 기수현에서 천완국을 세우자, 그는 서수휘의 속하 장수가 되어 활약했다.

원래 장대한 체격에 용맹하고 야심이 컸던 그는 1359년, 천완 정권의 장수인 조보승을 죽이고, 서수휘를 협박하여 강주로 천도하며, 한왕으로 자칭하였다. 

이듬해, 진우량은 서수휘를 제거하고 국호를 대한(漢), 연호를 대의로 하고 칭제 건원을 하였다.

 

당시 강남에는 양쯔강을 따라서, 상류에 진우량의 한, 중류에 주원장의 송, 하류에 장사성의 오가 대치하고 있었는데

진우량의 세력이 가장 컸다. 그래서, 주원장은 언제나 진우량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주원장은 진우량에게 없는 재능과 행운이 있었다. 사람의 마음을 사고, 인재를 보는 안목이 뛰어났던 것이다.

그래서, 공명에 버금간다는 유기와 장량, 소하에 비견되는 이선장, 호유용, 명장 서달, 남옥과 상우춘이 있었다.

반면 진우량은 용맹과 힘은 셌으나, 성격이 잔인하고 편협해서 용인술이 없었다.

주원장은 뛰어난 모사와 장수들과 민심을 끌어모아서, 우세한 진우량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진우량은 전투에서 계속 패배하자, 이러다가 결국 패망하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밑천을 다 털어서 단판 승부를 걸어왔다. 최후의 일전에 모든 배팅을 거는 진우량의 결의는 대단했다. 기록에 의하면~~ 아마 중국식 구라~ 60만명의

병력에다 높이가 10여 장이나 되는 대형 전함 수백 척을 건조했다. 배들은 빨간 색이 칠해졌고 3층의 구조에 말들이 달릴 수 있을 정도로 거대했다. 반면 주원장도 전군을 동원했지만 20여 만으로 열세였다.

 

주원장의 부하들의 능력에 못 미치는 진우량은 인해전술로 단판승부를 볼 작정이었던 것이다. 중국 역사상 가장 거대했던 수전이 파양호에서 벌어지게 된다.

진우량의 함대가 파양호에 들어오자, 주원장의 군대는 기가 질렸다. 거대한 함선들이 쇠사슬로 연결되어서, 수십 리로 이어지는 행렬은 마치 산들이 이동하는 거 같았다...고 기록에 나올 정도다. 내 생각에 적벽 대전에서 조조가 쇠사슬을 연결한 것이 아니고, 파양호 대전에서 모티브를 따온 거 같다.

 

엄청난 함대의 위용에 겁에 질린  부하들이 공포에 질려서, 도주하려는 기색을 보이자 주원장이 칼을 빼어 10여 명을 직접 참수하면서 독려하자, 결사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당시에 세계 최초로 파양호 해상전에서 화포가  씌여졌던 걸로 보인다. 양 측은 불화살과 화포를 발사하면서 36일 간의 격전을 벌였다. 전세가 엎치락 뒤치락하는 격전의 연속으로 쌍방 간에 숱한 희생이 빈발했다.

그런데, 역시 전략과 전술에서 주원장이 우월했다. 주원장은 미리 파양호에 들어가는 요충지인 호구를 장악해서 진우량의 보급로를 끊었다. 그래서 주원장은 양쯔강을 통해서 충분한 보급을 받아 병사들을 배불리 먹였으나, 진우량은 보급이

끊어져서 굶주렸고 사기가 떨어졌다.  

 

그런 상황에서도, 진우량군은 용맹하게 싸웠다. 그러나, 결국 천운이 주원장을 선택하게 된다. 전투를 벌이는 와중에 동북풍이 불어오자 주원장은 바람을 등지고 화공을 한다. 불 붙은 배들이 부딪혀 오자 쇠사슬에 매였던 거함들이 일제히

불타올랐다.

진우량군은 붕괴되었고, 진우량은 포위망을 탈출하려다가 화살에 눈이 관통되어 즉사했다.

 

일생일대의 적수 진우량을 무너뜨린 주원장에게 거칠 것이 없는 탄탄대로가 열렸다. 1360년, 첫 대결을 벌이면서 무려 3년간이나 벌였던 진우량과의 대결에서 최후 승리를 거두었던 주원장은 이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순조롭게 연전연승을 거두면서 천하를 손에 넣게 된다.

 

 

Comments